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난도 2세 (문단 편집) == 보수화, 그리고 [[1848년 혁명]] == 1836년부터 1837년에 걸쳐 왕국 남부의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콜레라]]가 유행해 7만 명이 사망하였고, 흉흉해진 민심은 1837년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입헌군주정 도입 요구 시위를 촉발하였다. 그러나 페르디난도 2세는 자유주의자들의 요구에 무력 진압으로 대응하였고, 경찰을 동원해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다. 한편 1839~1840년 사이에는 시칠리아 유황 광산의 채굴권 문제로 영국과 외교 분쟁이 발생하면서 영국과의 외교관계도 크게 악화되었다. 1837년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시위를 무력 진압한 것을 기점으로 페르디난도 2세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감사와 탄압을 강화해나갔다. 1844년과 1847년에 자유주의자들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역시 무력 진압과 주동자들에 대한 처형으로 대응하였다. 1848년 1월 시칠리아에서 전 유럽을 휩쓴 [[1848년 혁명]]을 촉발한, 분리주의 성격을 띤 대규모의 민중봉기(1848년 시칠리아 혁명)가 일어났다. 대규모 혼란 속에서 페르디난도 2세는 1월 29일에 헌법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의회 구성 과정에서 지속적인 혼란이 이어졌고, 혁명이 일어난 시칠리아에서는 그 해 7월에 독자적인 헌법이 공표되었으나 페르디난도 2세의 무력 진압 명령으로 9월에 군대가 투입되어 혁명군이 장악한 [[메시나]]를 무력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혁명 세력의 휴전 요청으로 메시나 점령 직후 휴전이 실시되었다. 메시나 점령 과정에서 해군의 포격을 동반한 대대적인 무력 진압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페르디난도 2세는 폭탄왕(Re Bomba)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849년 2월, 시칠리아 혁명 세력 측에 시칠리아에 독자적인 의회를 설치하는 것을 골자로 한 타협안을 제시하였으나 타협안이 혁명 세력에 의해 거부되자 3월 19일에 혁명 세력에 대한 무력 진압을 재개해 5월 15일에 시칠리아 혁명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이에 앞선 3월 13일에는 예산 문제로 의회에서 한 달 이상 혼란이 지속되자 의회를 해산하고 전제군주정으로 사실상 회귀하였다. 혁명 진압 이후, 페르디난도 2세는 반체제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과 처벌을 단행하였다. 1849년부터 1851년에 걸쳐 2000명에 달하는 반체제 인사가 투옥되었으며,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망명을 떠나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